포스테키안
2021 가을호 / POSTECH ESSAY
포스텍 교수님 이야기
내 삶 속의 화학
Interactions and Reactions
1999년 봄. 세기말과 금융 위기로 요동치던 시절 나는 처음으로 포항에 발을 들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하던 그때만 해도 내가 학부에서 대학원까지 화학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며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포항에 머무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 독일로 떠나 연구를 시작한 지 4년 뒤, 내가 다시 포항에 돌아와 학생으로 몸담았던 포스텍 화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만의 연구를 꾸려가는 위치에 서게 될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었다. 이런 뜻밖의 긴 여정을 통해 내가 어떻게 화학자로의 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보니 그 안에는 역시 화학이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시 내가 나아갈 길을 바라보면 역시 그 안에도 화학이 있다.
되돌아보면 화학에 맨 처음 매력을 느낀 순간은, 화학이 분자의 ‘상호 작용’과 이를 통한 ‘변화’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때였다. 알코올과 카복실산이 촉매와 만나 물 분자를 내보내고 에스테르가 되는 반응만 살펴봐도 서로 다른 세 분자가 만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분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지 않은가. 이후 긴 시간이 흘러, 지금 나는 이러한 상호 작용을 통해 분자들이 서로 모여 집합체를 이루는 것, 그리고 이들이 반응을 통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연구하는 화학자가 되었다. 현재는 분자집합체 구조 화학 연구실을 이끌며 분자들의 화학 반응에서 어떤 중간체가 형성되는지, 특히 원자나 분자들끼리 어떤 상호 작용으로 모이고 이를 통해 어떤 구조의 분자집합체를 형성하는지, 어떤 성질과 기능을 가지며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알아내는 방법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분석화학 및 물리화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분자들의 상호 작용으로 생기는 분자집합체와 이들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과정이 반응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발광 소자로 활용되는 반도체 나노 결정도 초반에 원자와 분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응집하여 중간체 결정핵이 만들어졌는지에 따라 결정의 성장에 큰 차이가 생기고, 이로 인해 최종적으로 초기 결정핵의 구조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지는 발광 소자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생체 내에 존재하는 일부 단백질들은 구조가 잘못 접히면서 서로서로 뭉치면 치매나 당뇨병과 같은 심각한 질환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 응집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자 간 상호 작용으로 만들어진 집합체의 구조를 이해하고 구조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추적하는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상호 작용과 변화. 이 두 단어가 흥미로웠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이들이 내 삶 속에 깊이 파고들어 와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 추억은 학과 행사에서 동기들과 함께했던 기억들, 축제에서 동아리 선후배들과 나누었던 추억들, 실험실 구성원으로 대학원 선후배 동기들과 나눈 열띤 토론과 실험들로 가득하다. 학위를 마치고 머물렀던 독일 베를린에서도 연구소 동료들과의 그룹 미팅, 두세 명이 밤샘 실험을 하며 나눠 먹던 피자, 커피 룸에 삼삼오오 모여 연구 논의를 하던 것들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분자가 기능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인 것처럼 개개인 한 사람도 모두 독자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는 있다. 하지만 DNA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2개의 상보적 사슬이 상호 작용하여 이중 나선을 만들어야 하고, 지질 분자들이 상호 작용을 통해 모여 지질 나노 입자를 만들어야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에서 중요한 mRNA를 세포 내로 안전하게 운반하는 역할을 할 수 있듯이, 공식 축구 시합을 위해서는 11명이 팀을 이루어야 하고, 이삿짐을 나르기 위해 우리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한다. 이렇듯 사람들도 분자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타인과 상호 작용하고 그 과정에서 짧게 혹은 길게 집단을 형성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매 순간 변화하고 동시에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결국 지난 삶 속에서 내가 누구를 만나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오늘의 내가 사람들과 어떻게 반응하고 협력하는지가 결국 내일의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20년 전, 나는 박사 시절 지도 교수님과의 첫 만남을 통해 분자량을 측정하는 질량 분석을 배웠고, 이후 여러 연구자와의 교류를 통해 분자량의 변화를 바탕으로 분자집합체의 형성과 변화를 질량 분석하여 추적할 수 있음을 알았다. 독일에서 만난 연구자들과의 협업으로, 빛을 이용한 연구기법을 질량 분석에 접목하여 분자집합체의 분자량뿐만 아니라 구조를 알아내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 주제가 내 안에 뿌리내렸고, 지금은 동료 교수님들 및 연구자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이를 더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 여정을 진행하며 내일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
때론 격렬하게 때론 부드럽게 다른 이들과 반응하며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해체되기도 하며 흘러가는 우리의 삶은 화학과 너무나도 닮았다. 그래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사이의 케미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삶은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고,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도움과 상호 작용이 언제나 나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가면 어떨까. 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가 아니라, 어느 길로 무엇을 타고 갈지, 그 여정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그리고 어떤 변화를 통해 나를 만들어 갈지를 생각하며 삶을 걷는 것은 어떨까.
독일에 머무른 4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돌아온 포항, 그리고 포스텍은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역동적이다. 사계절 아름답고 다채롭게 변하는 캠퍼스, 새롭게 올라가는 학교의 건물들, 낡은 시장 가운데 들어서는 젊고 힙한 카페들과 서점들을 발견하는 순간마다 이 도시와 캠퍼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쉼 없이 상호 작용하고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앞으로 나의 남은 삶을 함께할 이곳에서 또 누구를 만나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변해갈지 기대되는 마음을 담아 글을 맺는다.
11월 19일, 에세이와는 다른 매력의 서종철 교수님을 만나보세요!
글. 포스텍 화학과 서종철 교수